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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작가와 배우 김태리의 드라마 악귀에서 1,2화 연속 나오는  소품이 있다. 귀신 들린 물건인 붉은 댕기가 그것이다. 댕기는 고구려고분벽화에서도 끈으로 장식한 모습이 나올 정도로 역사가 오래되었는데 길에 땋은 머리카락 끝에 장식용으로 묶는 헝겊이나 끈을 뜻한다. 댕기는 길흉사 및 본인의 신분에 따라 재료 및 색을 다르게 사용했으며 댕기에 새겨진 문양에 따라서도 여러 가지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댕기의 역사

댕기는 고구려 및 백제와 신라 삼국에도 모두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고분벽화에 끈으로 장식한 모습도 남아있다. 몽고의 영향을 받게 되는 고려 후기에는 개체변발이 일반화되면서 댕기가 필수품이 되었다. 변발이란 머리카락을 길에 땋아 늘어뜨린 머리 모양을 뜻한다. 유목민족 사이에서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도록 먹줄과 같이 땋으면서 얻어진 명칭으로 북방 민족의 풍속 중 하나이다. 변발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자신의 머리카락만으로 땋는 것, 가발을 섞어 땋는 것, 머리카락 맨 끝에 첨발을 하는 방식등이 있다. 백제에서는 미혼녀의 경우 머리를 땋아서 뒤로 한 가닥을 내놓고, 결혼한 출가녀의 경우 두 가닥을 늘어뜨렸다고 한다. 고려 말의 개체변발은 머리 주변을 깎고 머리카락을 위쪽만 남겨 땋아서 묶고 늘어뜨리는 방식으로 몽고 특유의 풍속이다. 1272년에 세자 심이 변발호복인 상태로 원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나라 모든 백성이 울고 탄식했다고 하는데 이때 세자 심의 변발이 바로 몽고풍의 개체변발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총각 및 처녀, 부인까지 변발을 하게 되면서 댕기가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하기 시작했다. 개화기 이후에 서구식 리본이 들어오고 단발머리가 들어오면서 댕기가 차차 사라지게 되었다. 

 

댕기의 다양한 용도

예장용

  1. 자주 빛 댕기로 궁중의식에 사용하였던 떠구지댕기
  2. 어여머리에 더해 떠구지댕기를 할 때 연결 부분에 사용하는 검은 색깔의 너비가 좁은 댕기인 매개댕기 (어여머리란, 조선시대에 상류층 부인들이 했던 스타일로 예장용으로 크게 땋아서 올린 머리 모양을 뜻한다. 궁중에서 반가부녀들이 하였고 상궁 중에서는 지밀상궁만 이 머리를 했다. 화려한 떨잠은 머리 위와 머리 양 옆에 꽂고 머리 뒤에 붉은 색깔의 댕기로 장식한다.)
  3. 흑자주색의 비단류로 만드는 도투락댕기는 보통의 댕기보다 넓고 화려한 금박이 달려있다.  
  4. 흑자주색에 금박을 하였으며 갈라진 양끝에 진주나 산호주 등의 장식을 한 드림댕기는 혼례복에서 활용되는 뒷댕기와 짝을 이루는 앞댕기로써 활용된다.

일반용

  1. 변발을 한 총각이나 처녀가 활용했던 제비부리댕기. 총각은 검은색, 처녀는 붉은색을 사용했다. 총각의 경우 아무런 장식이 없는 댕기를 활용했으나 처녀는 금박을 하기도 하고, 비단으로 하기도 하였으며 댕기고에 칠보나비, 옥나비, 옥판 등을 붙이기도 하였다.
  2. 어린이용으로 만든 도투락댕기는 댕기 위에 조그마한 깃을 달아 뒤통수의 귀밑머리 밑에서 바짝 달아주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는 어린이의 뒷머리가 짧기 때문.
  3. 어린이용의 도투락댕기와 유사한 말뚝댕기. 어린이용이나 도투락댕기보다는 더 컸을 때 그리고 제비부리댕기를 하기 전에 하는 댕기다.
  4. 머리를 땋은 후 끝 부분에 끼워 넣어 쪽이 곱게 틀어지게 하는 쪽찔 때 사용하는 쪽댕기. 80~90세의 어르신은 내외가 함께 생존하고 있으면 자주색 댕기를 하였으며, 과부는 검은색, 상제는 흰색, 나이가 든 사람은 자주색, 홍색은 젊은 사람들이 사용했다.

궁녀용

두가닥댕기 또는 네가닥댕기와 팥잎댕기 두 가지를 활용했다. 궁중에서 세수간의 나인들과 무수리들이 사용했다. 여기서 나인이란 궁중 안에서 왕족의 사생활을 시중 하던 여관들을 뜻하는 단어다. 매우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궁녀는 평생 처녀로 살아가야 했다. 일종의 성년식인 관례를 치르기 전의 소녀나인을 수습나인이라고 했는데 이 수습나인에게는 나인으로 승격시키는 첩지와 옷감을 왕이 내리고 이름도 새로 지어주는 관례를 치르게 된다. 바로 이 날부터 정식 나인이 되며 제2의 탄생을 의미한다고 한다. 통상 수습나인이 치르는 관례는 입궁한 후 15년이 지나야 치를 수 있다. 보통 입궁을 7살 또는 8살에 하기 때문에 관례는 22살이나 23살에 하게 된다. 수습나인에서 나인으로 승격된 후 다시 상궁까지 올라가기까지는 15년이 다시 걸린다. 다만 예외적인 사항이 있는데 바로 승은을 입을 경우다. 왕의 사랑을 얻는 승은은 나인까지 15년, 상궁까지 다시 15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상궁으로 바로 승진할 수 있었다. 특히 승은을 입고 왕자녀를 낳을 경우 왕이 그녀를 얼마나 총애하느냐에 따라 종 2품인 숙의에서 종1품인 귀인까지도 될 수 있었다. 또한 그 아이가 세자로 책봉이 되기라도 하면 내명부에서 최고 빈인 정1품까지 올라간 사례도 있었다. 최고 빈에서 왕비까지 된 사례도 있었는데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문종비 현덕왕후 등이다. 희빈 장 씨는 왕비가 되었다가 죽음으로 끝난 사례였는데 이 사건 이후 궁녀에서 바로 왕비로의 승격은 법령으로 금지되었다고 한다.

무수리란 고려 및 조선시대에 궁중 안에서 심부름을 하던 여자 종을 뜻한다. 세숫물을 받거나 청소를 주로 했으며 이런 무수리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수사간 또는 세수간이라고 하였다. 무수리라는 단어는 몽골어에서 유래했는데 원나라 공주가 고려 후기에 고려 왕실로 들어오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때 여자 종을 무수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몽골어로는 소녀라는 뜻이다. 초기에는 밖과 안으로 출입을 하며 서로 번갈아 일을 하였으나 1411년부터는 궁중 안의 소식들이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궐 안에만 거주하도록 했다. 다만, 무수리들의 남편이 있고 없음을 고려해 10일씩 서로 번갈아 일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결혼 후에는 궁궐로 출퇴근하는 무수리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성종 대에는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조관과 종친은 무수리 및 궁녀들에게는 장가를 들지 못하게 금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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